본문 바로가기

잡담...그 속의 진심

우리 이제 그만 친절하자. (부제: 조현아 부사장 사건으로 돌아본 우리 사회의 문제점)



대한민국에 어느 날 친절 서비스 광풍이 불어닥쳤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삼성을 필두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친절 교육이 범람했던 것 같다. 고객 만족이 아닌 고객 감동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구호를 외치고, 전단을 돌렸다. 그리고 이제 사람을 상대하는 모든 곳에서 친절하지 못한 직원은 민원과 사과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친절 서비스는 애초에 어디서 비롯된 걸까. 나는 일본에 출장 다녀온 대기업 임직원의 머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적으로 ‘친절’하면 일본인을 떠올린다. 지나친 자기 낮춤(과잉 굽실거림)은 일본인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특징이지 않던가. 일본에 가면, 어느 가게에 들어서도 직원부터 사장까지 모두 굽실거리며 고객을 맞는다. 우리나라 사람을 포함해 많은 외국인이 일본인의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이는 인사법에 마치 자신이 중세의 왕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을 법하다. 그리고 이런 착각을 고객에게 서비스한다면, 고객 만족도가 올라가고 연달아 수익 또한 상승할 거라는 추론을 했음 직도 하다. 몇 기업이 직원들에게 친절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절 서비스를 일찍 차용한 기업의 매출이 오르자, 어느 순간 친절은 모든 기업의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진상 고객’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자신이 단지 고객이라는 이유로 직원들에게 언어폭력을 일삼고, 신체적 폭력도 서슴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고객과 직원의 관계에서 인권은 바닥에 떨어졌고, 관리직에 올라선 사람들은 ‘고객이 왕’이라며 오히려 고객 편에 섰다.



하지만 친절은 직원이 고객을 사로잡는 무기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직원이 고객에게 강요받아 마땅한 그 무엇은 아니다. 누가 고객에게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나 어울릴 법한 절대 권한을 주었는가 말이다. 직원 또한, 어느 가정의 귀한 아들과 딸이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이 시대에 헌법에서 정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평등한 1인이다. 경제적으로 부족하다고 해서, 두툼한 지갑을 가진 자들에게 무조건 굽실거려야 하는 노비가 아니라는 거다. 갑질이 익숙한 진상 고객에게 묻고 싶다. 자신의 동생이나 친자녀가 직원의 자리에 서 있더라도 동일한 친절을 강요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성숙하지 못한 과잉 친절 문화 속에서 우리 사회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라면 상무 때도 그랬고, 이번 조현아 부사장 사건도 마찬가지다. 퍼스트 클래스에 탄 고객도 승무원을 노비 부리듯 자신의 입맛에 따라 모든 행동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만에 하나, 고객이 아닌 부사장의 권한으로 규정에 어긋난 행동을 바로 잡고 싶었다면, 다른 고객들 몰래 조용히 해결하는 게 더 올바른 선택이었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부사장으로 있는 기업의 이미지를 한순간에 반의반 토막으로 깎아내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돈이 권력이며, 고용주는 고용인을 하인 부리듯 할 수 있다는 갑질 마인드가 아니고서야 그 촌극을 어찌 설명하랴.



일본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굽실거림 문화가 큰 부작용 없이 유지되려면, 고객 또한 직원과 마찬가지로 공손함이 몸에 배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일본에 가보면, 직원뿐 아니라 고객도 늘 굽실굽실이다. 직원은 고객에게 물건을 사줘서 고맙다며 굽실이고, 고객은 직원에게 좋은 물건을 싸게 줘서 고맙다며 굽실이다. 하여튼 그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필요 이상의 친절은 이제 그만 우리 사회에서 걷어내고 싶다. 얼마 전 두바이에 다녀올 기회가 있어 아랍에미리트 항공기에 탔을 때 일이다. 기내 서비스를 받는데, 국적기를 탈 때와는 많이 다른 승무원들의 서비스에 조금 놀랐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굽실거리는 친절함은 어느 승무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정말 편한 자세와 웃음으로 우리를 맞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친절했다. 



나는 갑질에 취한 진상 고객과 고용주들 때문에 일본과 같은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도 차라리 어울리지 않는 친절을 내려놓고 허리를 곧게 편 떳떳한 자세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직원의 아프도록 굽힌 허리에 희열을 느끼는 가학적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당신도 나와 함께 이 문화 창달에 동참하는 게 어떤가.